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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무엇인가 마이클샐덴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면서 과연 지금 이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건가?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고등학생때 대학입시를 준비할때도 좋은 사교육을 받는 친구들이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나는 그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보다 뒤쳐지는거야 그건 당연한거야라고 생각했었고 사회생활을 할때도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와 비교하면서 출발선이 다르다는 생각에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어요. 힘들때는 사회가 공정하지 않아서 그런거야 라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거야라는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요. 능력주의 사회에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공정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 '공정하다는 착각'입니다. 공정함에 대한 이슈에 관심이 있었거나 면접 및 논술 준비를 앞두고 계신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어요!

마이클 샌델, 10여년 만에 던지는 충격적 화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 마이클 샌델 10여년만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 출간! 샌델 기울어진 사회구조 이면에 도사린 '능력주의의 덫'을 해체하다. 또 다시 '공정'이 화두다. 언론 미디어를 통해 부유층과 빈곤층, 청년과 장년, 정치인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기업은 정규직·비정규직 논란에서 비롯된 '공정 채용' 문제로 혼란에 빠져있고, 정치권에선 '공정경제3법'과 '재난지원금'등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으로 떠들석하다. 대통령은 "하나의 공정이 또 다른 불공정을 부르는 상황"을 언급하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듯 '공정'리아는 하나의 화두를 두고 각계층이 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쓴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미국현지에서 2020년 9월에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왔던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본다.

 

출판사서평

능력주의는 공정하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가? 시간이 갈수록 계층이동은 어려워지고, 불평등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개개인의 능력을 불가침 가치로 둔 채 공정을 추구하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샌델은 이 책을 통해 능력주의 하에서 굳어진 '성공과 실패에 대한 태도'가 현대사회에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승자들 사이에서 능력주의가 만들어내는 오만과, 뒤처진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를 적나라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샌델이 책에서 제시한 '귀족주의 사회'와 '능력주의 사회'의 예시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이 압축 되어있다.

나라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둘다 재산과 소득이 '매우' 불평등하다(불평등의 정도는 두 나라가 같다.). 한 사회는 귀족정이며 소득과 재산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달려 있고 고스란히 대물림도니다. 다른 한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다.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은 세습 특권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얻은 결과물이다. 당연히 후자가 더 정의롭게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이 '부잣집에서 태어날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당신은 둘 중 어떤 사회에 태어나고 싶은가? 내가 부자일 경우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귀족제 사회가 정답일 것이다. 내가 가난하다면 노력으로 사회적 상승이 기회를 갖는 사회를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정반대로 생각할 점이 있다. 귀족제 사회의 부자는 자신의 특권이 '성취가 아닌 행운'임을 인식할 것이며, 빈자는 자신의 불행이 '내 탓이 아닌 불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삶이 고달프긴 해도 '이렇게 태어난 운'이 문제인 거지, 스스로를 탓하며 자괴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반대로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부자는 자신의 성공이 '행운이 아닌 성취'임을 인식해 당당히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빈자는 부족한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저주하면서 깊은 좌절에 빠질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어느 사회를 택할 것인가? 당신은 어느 사회가 '더 낫다(또는 정의롭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승자에겐 오만들 패자에겐 굴욕을 주는 '능력주의의 민낯' 능력 있는 자들만을 위한 낙원, 현대사회의 그림자를 들추다. 또한 샌델은 해결책도 모색한다. "하면 된다"는 공통의 신념이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기본적으로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인드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샌델은 몇가지 대안을 내놓는데, 특히 교육 영역에서의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제안은 충격적이면서도 그 발상이 매우 기발하다. "4만 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하버드나 스탠포드에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 일부와, 동료 학생들과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부만 솎아낸다. 그러면 아마 3만 명, 또는 2만 5,000명이나 2만 명의 지원자가 남으면 이들은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두고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 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 합격자를 뽑는다. 달리 말해 그들의 지원 서류를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나 2,000명을 골라잡는 것이다.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합격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본다.

이 대안이 의미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적 타당성이 있다는 데 있다. 가장 현명한 입학사정관이라 해도,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따져본다고 해도 18세 청소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경력을 쌓았는지 판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대학입시의 맥락에서 재능이란 모호하고 둔한 개념이 된다. 아마 수학 신동을 가려내기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재능의 일반적 평가는 더 복잡하고 더 예측하기 어려운 과제다." 샌델은 이렇게 '파격적'제안을 하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 이에 대한 반론(학업능력 저하, 다양성 확보, 동문우대 및 기부금 입학, 대학명예 실추 등)을 예상하고 나름의 대답까지 준비해놓는다. 독자들은 너누나도 당연히 생각했던 사안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훌훌 털어져 나가는 믿지 못할 논리적 경험을 하게 된다. 교육에서뿐만 아니다. 샌델은 직업과 현실적 삶에 대한 대안도 제시한다. 그는 사회적 기여 측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카지노왕과 고등학교 교사 사이의 소득(보상) 격차 등을 예로 들며 '일의 존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논쟁하자'고 주장한다. 또한 '삶의 어떤 영역은 운수가 좌우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함으로써, 능력의 오만을 혼내주고자 제안한다.

저자: 마이클 샌델

2010년 이후 한국에 '정의'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수업은 현재까지 수십년 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샌델이 진행 중인 영국 BBC의 정치철학 토론 프로그램 위대한 철학자들 시리즈는 '철학적 아이디어의 이면을 탐구한다'는 주제로 세계 각국의 토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27개국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 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말하다 등이 있다.

목차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입시윤리, 능력 지표 따내기 <CHAPTER 1.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능력주의의 윤리, 굴욕의 정치,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포퓰리즘의 준동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왜 능력이 중요한가, 우주적 능력주의, 구원과 자기 구제,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부와 건강, 자유주의적 섭리론, 역사의 옳은 편, 도덕 세계의 궤적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시장과 능력, 자기 책임의 담론,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포퓰리즘의 반격,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보는 것과 믿는 것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최고의 인재들,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드,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학력 간 균열, 기술관료적 담론,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기후변화 논란

<CHAPTER 5. 성공의 윤리>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시장과 능력,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성공에 대한 태도, 운수와 선택, 재능 계산하기, 능력주의의 등장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 쿠데타,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이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능력주의를 넘어라, 오만과 굴욕, 유능력자 제비뽑기, 인재 선발기 부숴버리기, 명망의 위계질서,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CHAPTER 7. 일의 존엄성> 일의 존엄성 하락, 절망 끝의 죽음, 분노의 원인,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기여적 정의,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열린 어젠다'의 오만,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추천의 글> 부의 양극화와 이를 공고화하는 고학력 세습화의 심화, 그리고 승자들의 오만함과 패자들의 굴욕감 사이 팽팽한 긴장감.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어둡고 불길한 징조의 근원을 그는 CT로 스캔을 하듯 뒤지고 있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이 명제들은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테마이며,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꿈의 나라가 된 것도 이 명제에 충실한 정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왜 문제라는 것인가.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 이런 목표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 즉 능력주의 사회는 근본적인 문제가 갖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미국적 현상이 2016년 도널트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부 출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소위 '아빠 찬스'라는 말로 제기된 공정성 문제와 인천공항공사의 계약직 정규화 관련 논란들이 이와 연결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한데, 2016년의 포퓰리스트 '반란'을 통해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연대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을 부추겨왔다.

<들어가며> 보건 전문가들이 전년도에 세계적 대유행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그랬다. 보건 자문위원들의 경고를 묵살해 버린 도널트 트럼프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초기 몇 주간 위기의 심각성을 평가절하했다. 미국 기업들이 지난 수십 년간 아웃소싱을 해온 결과, 덴탈 마스크와 의료기구를 중국 및 여러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공중보건은 우리가 단결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우리 모두의 취약성을 인지해 서로 거리두기와 함께 자가격리를 엄격히 지키도록 요구했다.

<서론> 2019년 3월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음모의 중심에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상담사가 있었다. 표준 시험 감독관들에게 돈을 찔러 주고 해당 학생들의 답안지를 조작해 성적을 부풀리도록 한 것이다. 또한 운동부 감독들에게도 돈을 써서 운동을 아예 할 줄 모르는 학생조차 특기생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사건은 상징적인 스캔들이었다. '누가 앞서가고 있으며, 그것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분노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굴욕의 정치> 굴욕의 정치는 부정의의 정치와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억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노를 잘 이해했으며 잘 써먹었다.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거친 표현을 퍼부었다. 오늘날 미국 정치를 나누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는 '대학 나온 사람 vs 안 나온 사람'이다. 트럼프는 비대졸자 표의 삼분의 이를 얻었다. 비대졸자는 브렉시트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고, 대학원까지 마친 사람은 상당수가 반대표를 던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굴욕의 정치에 아주 능란했다. 경제 정의라는 관점에서 그의 포퓰리즘은 가짜라고, '금권주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능력이 중요한가>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다.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효율성을 늘리고 차별을 배제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그렇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부와 건강> 축복의 복음이란, 부와 건강이 유덕함의 증표라는 능력주의적 신념과는 달리 행운 앞에서의 겸손함을 불러일으킬 것도 같다. 신학적으로 이는 구원이 일종의 성취이며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노력과 믿음만 있다면 부와 건강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매우 능력주의적인 이야기다. 모든 능력주의 윤리처럼,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그 개념은 일이 잘되어갈 때는 기꺼워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꺾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자기 책임의 담론> 1980년대와 1990년대, 사회적 책임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담론은 복지국가 관련 농쟁에서 두드러졌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동안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연대와 관련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시민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개인 책임을 확대해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 가정이 먹히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 삶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거나 비하할 소지 또한 커진다. 관대함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만 공동체의 도움을 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불평등이 위험수위까지 올라왔을때 이러한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보다 더 많이 벌고 있으며 중위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걸음만 한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 '일만 열심히 하면 성공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재자이며, 앞날은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다'는 보다 범위가 큰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인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국민들보다 인간의 자수성가 능력을 더 많이 믿는다.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능력주의 체제를 수용하는 사람은,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위해선 차별을 뿌리 뽑는 것 이상이 요구됨을 알고 있다. 글로벌 경쟁에 대한 이런 불편한 소식을 전한 오바마는 청중들에게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라고 확언했다. 수십 년간 진보 및 자유주의 정치권의 주된 담론은 이쪽을 맴돌았으며 그 끝능 브렉시트, 트럼프, 그외 포퓰리즘의 반격이었다. 글로벌 경제는 마치 자연법칙에 따르듯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교육 운운하는 이야기가 불평등을 직접 초래한 정책에서 민주당의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엘리트는 그들의 '스마트한 정책'에 대해 그 당파성을 모를 뿐 아니라, 입이 닳도록 "스마트하다", "우둔하다"를 말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도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많은 노동자들은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에 분을 품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마이클 영은 노동당과 뜻이 통하던 영국 사회학자였다. 영은 사라져 가고 있던 계급 중심 질서를 옹호하지는 않으며, 그 도덕적 자의성과 명백한 불공정성은 그것이 사라지는 게 바람직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류계급의 자만심을 부추기는 한편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종속적 상태를 개인적 실패로 보지 않도록 해준다고 했다. 엘리트가 기술관료적 전문가와 친화적임을, 그들이 그럴듯한 학위가 없는 사람을 내려다볼 것을, 그리고 이런 태도가 공적 담론에 미칠 악영향까지 내다보았다.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하이에크가 능력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재분재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롤스가 능력이나 자격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정반대의 정치적 입잘, 즉 '재분재 요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다만 개인의 능력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시장의 수요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정당한 세법이 시행되면 사람들은 법이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소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법이 애초에 그들의 능력과 성취를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능력주의 쿠데타> 학습능력은 '어느 고등학교를 나오왔느냐'와 '학비를 낼 재력이 되느냐'보다 덜 중요했다. 명문대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보고, 그 목표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을 배경 불문 모집하고 훈련시켜 사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시각을 담은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940년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서 나왔다.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 했다.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구조에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조용한 쿠데타 계획"이었다.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캄핑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히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우리 학생들은 우리 캠퍼스에서보다 밖에서 더 많이 배웁니다." 이는 학생이 비공식적이고 지속적인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배운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점점 '네트워크에서 배운다'는 뜻이 되고 있다.

<일의 존엄성 하락>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곤경만이 아니다.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뭘 가지는 게 정당한가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지난 수십년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버렸다. 그런 주장은 공적 문화 곳곳에서 메아리친다.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한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세금 정책의 도덕적 측면은 익숙하다. 우리는 보통 세금이 공정한지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세금의 표현적인 차원은 공정성 논의를 넘어선다. 사회가 어떤 활동을 '명예와 인정을 부여할 가치 있는 활동'으로 보느냐, 또 어떤 활동을 '억제해야 마땅할 활동'으로 보느냐에 이른다. 때때로 이런 판단은 노골적이다. 종종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세금이 일과 연관될 때, 그리고 돈을 버는 다양한 방식과 연관될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민주주의와 겸손>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가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평소에 접했던 책들보다 다소 어려웠던 주제의 책이였어요. 문득 생각해보니 대학생때 교양수업으로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복잡하다 지금은 굳이 몰라도 되겠지 하고 그냥 넘겼던 문제였는데 서른이 넘은 어른이 되어 보니 더욱 진지한 자세로 읽게되었어요.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핫한 이슈로 논의되고 있는게 바로 공정함이죠. 정유라 특혜논란, 조국사태를 보면 끊임없는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어요. 이런 문제는 미국에서도 많이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웠어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이런 논란이 되고 있구나. 아직 정확하게 공정함이 무엇이다라고 확정은 못하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금 시대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하게 보게되었어요!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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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반짝